한 번은 새로운 향수로 뭘 살지 고민하다가 이런 의문이 든 적이 있다.
요즘 바디/헤어부터 화장품, 향수, 세제 등
일상 이곳 저곳에서 다양한 향을 마주하게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특정 향으로 일관되게 맞추는 걸까?
현대인은 너무 많은 합성향 속에 둘러쌓여 있다
나만 해도 마음에 드는 향수는 우디 계열이지만, 그당시 몸을 씻는 바디워시는 상큼한 자몽 향이었다. 헤어 에센스는 화이트 머스크 향. 바디 로션은 너무 진하지 않은 베이비파우더향. 섬유유연제는 코튼 향. 팬데믹 이후 급부상한 한 브랜드의 제품으로 선물받은 새니타이져는 거의 향수 급의 유니크한 향. 핸드크림은... 화장품은... 실내 디퓨저는... 이하 생략. 일상에서 접하는 향이 너무 이곳 저곳에 포함되어 있다 보니, 사용하게 되는 모든 용품의 향 종류를 비슷한 라인으로라도 맞추는 것조차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향은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감정과 상태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여겨져왔다. 그래서 향(香) 첨가는 옵션이 아닌 필수로 탑재되어 다양한 상품군으로 출시된다. 최근 화제가 된 콘텐츠 '청소광 브라이언'의 브라이언은 청소와 깔끔/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에 환장하는데 그가 동시에 켜는 향초만 14개 정도라고 한다. 이런 행동을 조금은 특이할 지 언정 쉽게 이해하게 되는 이유는, 향이라는 것은 역시 인간에게 좋은 기분을 선물해준다는 인식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화학물질을 배합한 액체일 뿐인데도, 향수라는 상품군이 럭셔리 아이템으로도 자리잡은 이유가 있다.
여기서 나의 의문은 다음을 향한다.
향은 정말우리에게 좋기만 할까
새 차, 새 집 냄새를 맡고 속이 안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누구나 지하철처럼 밀폐된 공간에서 아무리 유명하고 고급스러운 향도 과하게 뿌린 사람과 함께 타면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 몸에 좋지 않은 환경과 이상반응임을 캐치한다. 소위 '맡기 좋은 향'이 아닐 때는 문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지만, 사실 특정 냄새/향에 반응한다기 보다 화학물질에 반응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일상의 우리 주변도 다시 되돌아 볼 여지가 있다. 과연 맡기 좋은 적정 수준의 향이라고 해서 과연 위험하지 않을까?
담배만큼 유해할 수 있는 잠재적 독성물질, 향 (Fragrance)
이미 2012년에 제작된 향 관련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한 화학물질민감증 환자는 향을 맡으면 통증이 며칠씩 지속되고 사고기능이 마비되어 저능아가 되는 수준이라, 사막 한복판에서 살고 슈퍼마켓에 들를 때는 '방독면'을 쓴다. 다큐멘터리에서는 환자의 사례뿐만 아니라 향기와 관련한 업체의 도를 넘은 마케팅, 향 첨가 제품의 유해성분들, 합성향 남용에 대한 규제 움직임 등에 대해서도 다룬다.
처음 이 다큐를 배속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나 역시 향 첨가 제품에 어떠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고, 향은 나와 환경을 더 낫게 해준다는 막연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다≫ ‘향기 공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섬유유연제 등의 향기로 인해 ‘화학물질 과민증’을 비롯하여 다양한 건강상 피해를 발생시키는 ‘향기 공해’는 아직 사회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www.ildaro.com
2010년 전후부터 일본에서는 화학물질 과민증 진단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처럼 향기로 인해 피해자가 된 사람들이 목소리를 모으고 의견 내는 장을 만들기 위해 '카나리아 네트워크 전국'이라는 조직도 결성했다고 한다.
당장은 일상에서 향을 하나씩 덜어내기
생각도 못한 문제를 인식하게 된 이후에도, 비록 사고 싶었던 향수를 포기할 수는 없었지만 (ㅠㅠ) 대신 다른 일상 용품에서부터라도 무향을 찾아다녔다. 그래서 지금은 바디워시, 바디로션, 세제, 섬유유연제, 섬유탈취제가 무향이다. 다만, 아직까지는 '무향'이라는 것을 상품 기능으로 취급하는 브랜드가 많지 않아서 선택의 여지가 크지 않고, 평소 제품 구매할 때처럼 가격을 민감하게 고려해서 결정할 수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무향이 더 비싸고, 상품 서칭에도 시간이 든다;;) 그럼에도 무향으로 일상 용품 일부를 대체한 뒤에는 너무 많은 향이 뒤덮여 알게 모르게 불편했던 코가 좀 더 편해졌다. 물론 이렇게 해도, 집 밖만 나가면 세상은 온통 향 천지라서 피할 수 없는 게 현실이지만.
모두의 문제로 자리잡기를
그렇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인공향의 위험을 알길 바란다. 나는 지인과 어쩌다 향 관련 상품이나 추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넌지시 불편하지 않게 향의 위험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나중에 다큐멘터리 영상을 공유해준다. 그럼 모두 나처럼 생각도 못한 문제였음을 마주하고, 이전보다는 소극적으로 향을 대하기 시작하더라. 그리고 아직 포기 못한 향수를 포함하여 나로부터 발산되는 향이 누군가에게 과함이 되지 않도록 더 주의해야겠다. 화학물질 과민증 환자를 나와의 일과는 구분 짓고 바라보는 시선은 다큐멘터리가 제작된 2012년이나 지금 2024년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 가장 무서운 변화는 시나브로 아닐까. 더불어 조금 자본주의적인 시각이지만 지금 시대에 가장 잠재력있는 소구 포인트는 다양한 향 마케팅이 아니라 '무향' 마케팅일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더 다양한 무향 옵션이 만들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무향에 취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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